함께 걸으시는 주님

본문말씀: 누가복음 24:13-35


핵심 주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절망의 길을 걷는 성도를 먼저 찾아오셔서 말씀으로 마음을 회복시키시고 다시 소망의 길로 인도하신다.


얼마 전 제주에서 실종된 한 여성에 대한 기사가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30대 여성이 석 달 전 혼자 외출한 뒤 실종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끈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는, 처음 실종신고가 접수되었을 때 경찰이 가족에게 "실종자와 연락이 닿았다"고 알리며 사건을 종결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본격적인 수색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석 달이 지난 뒤에도 여성이 돌아오지 않자 가족은 다시 실종신고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더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처음 경찰이 실종자와 연락했다는 기록은 사실이 아니었고, 관련 자료들마저 모두 삭제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경찰은 뒤늦게 대대적인 수색에 나섰지만, 이미 석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 주변 CCTV 등 중요한 단서들은 대부분 사라진 뒤였습니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제주에서 최근 몇 년 동안 접수된 성인 실종신고는 수천 건에 이르고, 아직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이 기사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가족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이럴 수 있었겠는가." 결국 사람들은 "이제는 아무도 믿지 말라."는 말까지 합니다. 그만큼 세상은 불신이 깊어졌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도 믿지 말고, 신도 믿지 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 말이 참 마음에 걸렸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살아가다 보면 그런 마음이 들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 "이제는 믿어도 소용이 없다." 사람에게 상처를 받으면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되고, 기도가 오래 응답되지 않으면 하나님마저 멀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바로 그런 마음의 길을 '엠마오'라고 보여 줍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약 11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마을입니다. 거리는 멀지 않았지만, 두 제자에게는 그 길이 너무도 길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 무너진 꿈을 안고 돌아가는 길이었고, 실패를 인정하며 걸어가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의미 있게 "그 날에"라고 기록합니다. 이 날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바로 그날입니다. 하늘에서는 죽음을 이기신 가장 영광스러운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제자에게는 가장 절망스러운 날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위대한 일을 이루고 계셨지만, 제자들은 그것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슬픔이 너무 커서, 낙심이 너무 깊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복음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실망시킬 수 있습니다. 사람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절망 속에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셨던 것처럼 오늘도 우리를 먼저 찾아오셔서 다시 일어설 힘을 주시는 분이심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 주님은 절망의 길을 걷는 사람을 먼저 찾아오십니다. (13-24절)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저는 이 한 문장이 오늘 본문의 가장 큰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가장 먼저 어디로 가셨습니까? 대제사장에게 가지 않으셨습니다. 빌라도 앞에 나타나 자신의 부활을 증명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루살렘 광장 한가운데 서서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이 살아나셨음을 선포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대신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두 제자가 걸어가는 한적한 시골 길을 찾아가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주님께는 세상의 박수보다 낙심한 한 영혼이 더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곧바로 "나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먼저 질문하십니다.
"무슨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으며 걸어가느냐?"
예수님은 모르셔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마음을 열게 하시기 위해 물으신 것입니다. 상처는 말할 수 있을 때 치유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나님께 상황을 설명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형편을 다 알고 계십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정보를 드리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우리의 무너진 마음을 내려놓는 시간입니다.
두 제자는 그동안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실망을 쏟아냅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바랐노라.' 이 말 속에는 이미 희망을 접어버린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희망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예배는 드리지만 마음은 지쳐 있습니다. 기도는 하지만 기도에 대한 기대가 사라질 때가 있습니다. 찬양은 하지만 가사와 내 마음이 너무 멀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이 떠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 한 번도 그들을 떠나신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더 큰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서 그들을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느끼지 못한다고 하나님이 떠나신 것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함께하지 않으시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의 속도에 맞추어 걸으시며, 우리보다 먼저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2. 주님은 말씀으로 우리의 해석을 바꾸십니다. (25-27절)

예수님은 두 제자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지 아셨습니다. 그것은 현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눈이 가려졌다는 것은 시력을 잃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절망이 마음을 덮어 하나님의 일하심을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낙심하면 현실만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보다 눈앞의 문제가 더 크게 보입니다. 염려는 하나님의 음성을 작게 만들고, 두려움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예수를 바라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단순히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라는 말씀입니다.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하나님께서 지금도 일하고 계심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적을 먼저 보여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성경을 풀어 주셨습니다. 왜 말씀입니까? 믿음은 기적보다 말씀 위에서 자라기 때문입니다. 기적은 놀라움을 줄 수 있지만, 말씀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십자가는 실패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원의 길이었다고 설명하십니다.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자신의 기대를 기준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뒤에는 이렇게 고백할 때가 있습니다. "그 일이 없었다면 하나님을 이렇게 깊이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사건 자체를 바꾸기보다, 그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바꾸어 줍니다. 예배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배는 단순히 위로를 받는 시간이 아닙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시선으로 내 인생을 다시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3. 주님은 회복된 사람을 다시 사명의 자리로 보내십니다. (28-35절)

마을에 도착하자 예수님은 더 가시는 것처럼 행동하셨습니다. 그러자 두 제자가 간청합니다.
"우리와 함께 유하소서."
이미 그들의 마음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이 그들의 마음을 녹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식탁에서 예수님께서 떡을 떼어 주시는 순간, 그들의 눈이 열립니다. 누가는 왜 이 장면을 자세히 기록했을까요? 누가복음에서 식탁은 언제나 은혜가 베풀어지는 자리였습니다.
죄인들과 함께하셨던 식탁, 오병이어를 나누셨던 식탁, 마지막 만찬의 식탁, 그리고 엠마오의 식탁까지. 예수님은 늘 식탁에서 사람들을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들은 떡을 떼시는 손길을 보는 순간 깨닫습니다.
"주님이셨구나."
그런데 예수님은 곧 보이지 않게 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제는 눈으로 확인하는 믿음이 아니라 말씀을 붙드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순간이 있습니다. 여름이 되면 수련회를 하고, 성경학교를 하고, 또 시간이 지나면 방학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언제나 특별한 은혜 속에 있을 수 없고 중요한 것은 우리의 더 긴 일상 속에서 은혜를 유지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눈으로 확인하는 믿음이 아니라 말씀을 붙드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말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이것이 회복입니다. 회복은 단순히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로 마음이 다시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환경은 그대로였습니다. 로마도 그대로였습니다. 십자가 사건도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가 달라졌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마음이 회복되자 방향도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는 절망하며 떠났던 길입니다. 이제는 기쁨으로 다시 걸어갑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세상이 달라져야만 감사하는 믿음이 아니라, 환경이 바뀌어야만 기뻐하는 믿음이 아니라, 말씀으로 마음이 살아나 다시 걸어갈 수 있는 믿음입니다.
혹시 요즘 감사가 사라졌습니까? 은혜가 메말랐다고 느껴지십니까? 신앙이 식어 가는 것처럼 느껴지십니까? 그것은 어쩌면 우리의 마음이 엠마오를 향하고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그 길에서 돌이키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돌이키는 것은 또 다른 기적이 아닙니다. 말씀을 붙드는 믿음입니다. 말씀을 듣고 다시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합니다. 두 제자는 그날 밤 곧바로 돌아갑니다.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오늘 이 예배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이 자리로 부르셨습니다. 오늘도 말씀을 통해 우리의 발걸음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려 주실 줄 믿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지금 여러분도 엠마오를 향해 걷고 계십니까? 그 엠마오는 어떤 길입니까?
오늘 말씀은 분명히 말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낙심한 제자들을 기다리지 않으셨습니다.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그들의 속도에 맞추어 걸으셨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주셨습니다.
말씀으로 마음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용기를 주셨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같은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엠마오는 끝이 아닙니다. 엠마오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은혜의 전환점입니다. 기적이 우리를 끝까지 붙드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우리를 붙듭니다. 환경이 우리를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주님이 우리를 일으키십니다.
이번 한 주도 혹시 엠마오 같은 길을 걷게 되더라도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이미 그 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십니다.
그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다시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가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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