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결된 공동체

 본문: 고린도전서 12:12-27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 고린도전서 12:1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 사람이 한 공간에 있다고 해서 반드시 공동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출근 시간 지하철을 생각해 보십시오. 한 칸에 수많은 사람이 아주 가까이 붙어 있습니다. 어떤 때는 가족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람들을 공동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까이 있기만 할 뿐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같은 아파트에 수백 세대가 살아도 서로 이름조차 모를 수 있습니다. 같은 회사에서 오랫동안 근무해도 업무 외에는 서로의 삶에 관심이 없을 수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예배당에 앉아 있다고 자동으로 하나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찬송을 부르고, 같은 설교를 듣고, 같은 교회 이름을 사용한다고 해서 반드시 성경적인 공동체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공동체는 한 공간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결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신앙을 너무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나만 하나님 잘 믿으면 되지.” “나는 예배만 잘 드리면 돼.” “사람 때문에 상처받기 싫으니 조용히 신앙생활하고 싶어.”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데, 이런 생각이 어디서 나타나는가 하면,

지난 번 TV 프로그램 나는 솔로다 32기에 등장한 장면인데,
영숙이라는 사람이 처음 자기소개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만남의 조건을 이야기하면서 자기는 크리스챤인데 주일에 교회가는 것만 이해해 주면 좋을 것 같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성가대를 하는데 그것만큼은 자신의 즐거움이라서 빠지면 안된다고 말하면서 남성에게는 강요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고 어느 정도 상대가 정해질 때 쯤되서 방송된 내용을 보면,
이 영숙이라는 사람이 상대 남자가 주일에 교회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냐? 하니까, 주저주저하면서 말하기를, 뭐 그렇게 열심히 하지는 않아서 빠져도 된다는 식으로 대답을 합니다.
저는 이것을 보는 많은 사람들이 과연 주일성수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하는 걱정어린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저 주일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아주 사소한 것 중에 하나라고 생각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게 뭡니까? 이게 신앙을 너무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가고 안가고도 내가 결정하고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이게 하나님과 나 사이만 좋으면 그것이 신앙이라고 착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를 설명하면서 아주 독특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를 건물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학교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회사를 비유로 들지도 않습니다.
몸이라고 합니다. 왜 몸입니까? 몸의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연결이기 때문입니다. 눈은 혼자 존재할 수 없습니다. 손도 혼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발도 혼자 존재할 수 없습니다. 각각 다르게 생겼고 하는 일도 다르지만 한 몸 안에 연결되어 있을 때 생명이 유지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예배를 드리러 잠시 방문하는 곳이라고 생각합니까? 필요할 때 도움받는 곳이라고 생각합니까? 좋은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곳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나를 연결해 주신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생각합니까?
고린도전서 12장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서로가 필요하다.” 왜 그렇습니까? 오늘 세 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 우리는 한 성령으로 한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서로 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서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한 지체의 아픔과 기쁨은 모든 지체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Ⅰ. 우리는 한 성령으로 한 몸이 되었습니다

12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바울은 우리의 몸을 예로 듭니다. 우리 몸에는 수많은 지체가 있습니다. 눈이 있습니다. 귀가 있습니다. 손이 있습니다. 발이 있습니다. 심장이 있습니다. 폐가 있습니다. 수많은 기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여러 개의 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한 몸이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지체가 하나의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것이 교회라고 말합니다. 교회에는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성격도 다릅니다. 자라온 환경도 다릅니다. 나이도 다릅니다. 직업도 다릅니다. 신앙의 연수도 다릅니다. 좋아하는 것도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조용합니다. 어떤 사람은 적극적입니다. 어떤 사람은 계획을 꼼꼼하게 세웁니다. 어떤 사람은 일단 시작하고 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많은 사람을 향하여 말합니다. “너희는 한 몸이다.”

무엇이 우리를 한 몸으로 만들었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한 성령으로.” 교회의 하나됨은 인간적인 친밀감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셨기 때문에 하나입니다.

1. 고린도교회는 원래 하나 되기 어려운 교회였습니다

우리가 고린도전서를 읽을 때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모범적인 교회였기 때문에 바울이 이런 말씀을 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고린도교회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1장부터 분열이 나옵니다. “나는 바울에게 속했다.” “나는 아볼로에게 속했다.” “나는 게바에게 속했다.” 서로 편을 나누었습니다. 은사 때문에도 갈등했습니다. 어떤 은사를 가진 사람이 자신이 더 영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회적인 차이도 있었습니다.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함께 있었습니다. 주인의 신분을 가진 사람과 종의 신분을 가진 사람이 함께 예배했습니다. 유대인과 헬라인도 함께 있었습니다. 당시 사회의 기준으로 보면 쉽게 하나 되기 어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에게 말합니다. “서로 비슷해져라.”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격을 맞추어라.” 그렇게도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더 근본적인 사실을 말합니다.
“너희가 이미 한 성령으로 한 몸이 되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2. 교회의 하나됨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 되어야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보다 먼저 더 놀라운 사실을 선언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 안에는 동일한 성령께서 거하십니다. 그래서 교회의 하나됨은 친한 사람들끼리 만드는 인간적인 결속보다 훨씬 깊습니다.

교회에서 친한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나와 생각이 비슷한 사람과 함께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나를 인정해 주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그것보다 더 멀리 갑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사람까지 나의 형제와 자매로 주셨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신비입니다.

가족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이가 태어날 때 형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저 형은 성격이 마음에 드니까 형으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동생도 선택하지 않습니다. 부모도 선택하지 않습니다. 태어나 보니 가족입니다.
교회도 비슷합니다. 우리는 거듭나면서 하나님의 가족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나와 전혀 다른 사람들이 형제와 자매로 앉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이 사람과 잘 맞다, 저 사람과 잘 맞다,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왜 우리를 같은 몸에 두셨는가" 를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사실 마음이 맞지 않아서 불편함을 겪는 일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관계가 너무 좋습니다. 원래 좋았던 것인지 아니면 나중에 좋아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뭏든 우리는 잘 맞지 않아 불편함을 겪는 경우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뭐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인데, 중요한 것은 이 가족과 같은 분위기를 그리스도 안으로 끊임없이 가져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 보면, "너희는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고 가족이라 말할 수 있는 근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을 때, 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고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손님이나 관객이 아니라 교회를 세워가는 한 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Ⅱ. 우리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서로가 필요합니다

14절입니다.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이 말씀은 너무 당연해 보입니다. 그런데 공동체에서 매우 중요한 진리를 가르칩니다. 하나됨과 다양성은 서로 반대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이지만 똑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르기 때문에 몸이 건강합니다.

1. 열등감은 공동체를 무너뜨립니다

15절과 16절을 보십시오.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재미있는 장면입니다. 발이 손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나는 손이 아니야.” 귀가 눈을 바라봅니다. “나는 눈이 아니야.” 이것은 무엇입니까? 비교입니다.

비교하면 두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는 열등감이고 다른 하나는 우월감입니다. 먼저 열등감입니다. 교회에서도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저 사람처럼 기도를 잘하지 못해.” “나는 찬양도 못해.” “나는 성경도 많이 몰라.” “나는 사람들 앞에서 말하지 못해.” “나는 특별한 은사가 없는 것 같아.” 그러면서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너도 몸의 지체다.”
발이 손이 아니라고 해서 몸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닙니다. 귀가 눈이 아니라고 해서 쓸모없는 것이 아닙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상상해 보십시오. 온몸이 눈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거대한 눈 하나가 굴러다니는 모습입니다. 볼 수는 있지만 걸을 수 없습니다. 들을 수도 없습니다. 무언가를 잡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몸을 그렇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각 지체를 다르게 만드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그분의 뜻대로 두셨습니다

18절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누가 두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두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존재와 은사에 대한 시각을 바꾸어 줍니다.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른 것은 실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부족함과 죄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고유한 은사와 역할까지 다른 사람과 똑같아질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 잘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보다 행동으로 섬깁니다. 어떤 사람은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데 강합니다. 어떤 사람은 시작된 일을 꾸준히 유지하는 데 강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픈 사람을 잘 돌봅니다. 어떤 사람은 행정적인 일을 꼼꼼하게 처리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이들을 잘 품습니다. 어떤 사람은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묵묵히 기도합니다.

우리는 눈에 잘 보이는 은사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보지 않으십니다. 심장을 생각해 보십시오. 심장은 밖에서 보이지 않습니다. 거울을 보아도 심장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심장이 멈추면 몸 전체가 위험해집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강단에 서는 사람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찬양하는 사람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직분을 가진 사람만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아무도 모르는 자리에서 기도하는 성도가 중요합니다. 주일 아침 일찍 와서 준비하는 손길이 중요합니다. 식사를 준비하는 손길이 중요합니다. 아이들을 돌보는 교사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지체를 사용하여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는 별로 할 일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몸 안에 두셨다면 여러분에게는 분명한 자리가 있습니다.

3. 우월감도 공동체를 무너뜨립니다

이제 반대 문제가 나옵니다. 21절입니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앞에서는 발이 “나는 필요 없어”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눈이 손에게 말합니다. “나는 네가 필요 없어.” 첫 번째는 열등감인데, 두 번째는 교만입니다.

그런데 두 가지의 뿌리는 같습니다. 둘 다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열등감은 말합니다. “나는 저 사람만 못해.” 교만은 말합니다. “저 사람은 나만 못해.” 그러나 복음은 둘 다 내려놓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자, 우리 자녀들에게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러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알지만 때로 저 집 애는 이렇게 한다더라, 이 집에는 뭘 잘 한다더라, 하면서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이게 다 뭡니까? 비교입니다. 그러면 자녀의 마음 속에는 아무리 건강해도 열등감이라는 것이 들어옵니다. 그러면서 잘 했다고 칩시다. 열등감을 극복하고 열심히 해서 좋은 자리에 오르게 되면 그 열등감은 사라지지만 다른 것으로 나타납니다. 뭐요? 교만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부모가 자녀를 가르칠 때 무엇으로? 은혜로 가르치기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7절은 묻습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내가 가진 은사도 받았습니다. 건강도 받았습니다. 기회도 받았습니다. 믿음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진 것으로 다른 사람을 무시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케스트라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 악기가 있지만 그 중에서 바이올린이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나오니까 나만 있으면 돼. 중간에 한 번 꽝 치고 사라지는 심벌은 없어도 돼, 라고 하면서 다 내보낸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두 말 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름다운 음악은 같은 악기가 많다고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악기가 같은 악보를 따라 한 지휘자에게 순종할 때 만들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녀들도 이 성경의 원리 안에서 우리가 은혜 가운데 양육한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그 자리를 잘 찾아 들어가 쓰임받는 사람들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지휘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악기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됨이란 “모두 나처럼 생각하십시오”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께 순종합시다.” 이것이 하나됨입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가 갈등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도 다름을 틀림으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성격이 다를 수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생각도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왜 다 나같지 않지? 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몸에 대한 말씀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의 말씀은 뭡니까? “하나님께서 저 사람의 다름을 통해 우리 공동체에 무엇을 주려고 하실까?”로 바꾸어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4-6절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베드로전서 4장 10절도 말씀합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다른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다름을 틀림이라고 하는 경쟁으로 만들 때 문제가 됩니다. 다름이 사랑 안에서 연결되면 오히려 공동체의 풍성함이 됩니다.

Ⅲ. 한 사람의 아픔은 공동체의 아픔입니다

이제 바울은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갑니다. 25절입니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여기서 공동체의 중요한 목적이 나옵니다.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서로 돌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26절은 매우 유명한 말씀입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이것이 진짜 공동체입니다.

1. 몸은 아픔을 공유합니다

밤중에 집 안을 걷다가 새끼발가락을 가구 모서리에 세게 부딪혀 본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새끼발가락 하나가 부딪혔습니다. 그런데 반응은 새끼발가락만 합니까? 아닙니다. 입에서 소리가 나옵니다. 얼굴이 찡그려집니다. 손은 즉시 발가락을 감쌉니다. 몸을 숙입니다. 눈에서는 눈물이 날 수도 있습니다. 새끼발가락 하나의 고통에 온몸이 반응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발가락을 다쳤는데 손이 말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발 문제이지 내 문제가 아니야.” 그 몸은 정상적인 몸이 아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성도가 아프면 그것은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청년 한 사람이 믿음에서 멀어지고 있다면 그것은 청년부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다음 세대가 교회를 떠나고 있다면 교육부서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 성도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우리는 함께 마음을 써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2. “서로 돌봄”이 공동체의 영성입니다

우리는 영성을 개인적인 것으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기도를 얼마나 오래 하는가, 성경을 얼마나 많이 읽는가, 예배에 얼마나 열심히 참석하는가. 물론 모두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영성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기준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에 얼마나 반응하는가입니다.

야고보서 2장 15-16절은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말로만 평안히 가라고 하는 신앙을 책망합니다. 요한일서 3장 18절도 말합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사랑은 마음속의 좋은 감정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랑은 움직입니다. 연락합니다. 찾아갑니다. 기도합니다. 필요를 살핍니다. 시간을 내어 줍니다. 때로는 물질을 나눕니다. 말없이 옆에 앉아 줍니다.

로마서 12장 15절은 말합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우는 사람에게 울지 말라고 설명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함께 울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은 그를 다시 살리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1장 35절을 보면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답을 알고 계셨지만 먼저 그들의 슬픔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것이 성육신적인 사랑입니다. 멀리서 충고하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가서 함께하는 것입니다.

3. 다른 사람의 성공도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그런데 26절 후반은 또 하나를 말합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고통을 함께하는 것도 어렵지만 때로는 이것이 더 어렵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됨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칭찬을 받습니다. 누군가 직분을 맡습니다. 누군가 사업이 잘됩니다. 누군가 자녀의 좋은 소식을 전합니다. 누군가 나보다 더 인정받습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속에 작은 불편함이 생길 수 있습니다. “나는?” 비교가 시작됩니다. 그 순간 공동체는 경쟁 관계로 변합니다.

그러나 몸의 원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오른손이 상을 받았다고 왼손이 질투합니까? 눈이 아름다운 것을 보았다고 귀가 섭섭해합니까? 한 지체의 영광은 몸 전체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성숙한 공동체는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잘되어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용하시는 것이 기쁩니다.” “당신의 은사가 우리 공동체의 복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다음 세대, 청년부를 포함한 우리 다음 세대들이 정말 잘 되고 성공하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정말 진심으로 축하해 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 7년이 되고 그 때는 초등학교, 중학교 였던 친구들이 성장해서 이제 대학을 가고, 졸업하고 직장인이 되고, 이제는 교회에 십일조를 하고,
우리가 다 한 몸이기에 축복하고 기도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제 27절입니다. 오늘 본문의 결론과 같은 말씀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바울은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처럼 행동하라”고만 하지 않습니다. 더 근본적인 선언을 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교회는 단순한 종교단체가 아닙니다. 친목단체도 아닙니다.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의 모임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렇다면 매우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세상은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해 봅니다.

교회가 사랑하면 세상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봅니다. 교회가 용서하면 세상은 그리스도의 용서를 봅니다. 교회가 약한 사람을 돌보면 세상은 그리스도의 긍휼을 봅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 될 때 세상은 복음의 능력을 봅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하나됨은 단순히 “교회 분위기가 좋다”는 문제가 아닙니다. 복음의 증거와 관계된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3장 35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우리의 하나됨은 세상을 향한 설교입니다.

결론 — 혼자서는 몸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개인주의가 강한 시대를 살아갑니다. “내 인생.” “내 선택.” “내 시간.” “내 권리.” 개인의 자유와 책임은 소중합니다. 그러나 이런 문화가 신앙 안으로 들어오면 위험한 신앙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내 신앙만 잘 지키면 된다.”

그러나 성경을 잘 보면, 혼자만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면서 십자가를 통해 그 몸에 우리를 연결시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는 반드시 “서로”가 필요합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용납하고, 서로 격려하고, 서로 짐을 지고, 서로 기도하고, 서로 섬기는 것이 교회입니다. 신약성경에 “서로”라는 표현이 반복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앙은 혼자 완성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함께함의 의미가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한 몸으로 만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몸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섬기고, 세워나갈 때, 그로 인해 우리가 더 건강해지고 강건해지고 이 어려운 세상 속에서 소망을 잃지 않는 성도가 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 믿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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